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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
재위 1674~1720.
※ 숙종의 비
- 인경왕후 김씨{1674~1680(사망)}
- 인현왕후 민씨{1681~1689(기사환국)} {1694(갑술옥사)~1701(사망)}
- 인원왕후 김씨{1702~1720(숙종사망)}
※ 후궁
희빈장씨 {1690~1694(갑술옥사)}, 1701(사사)
숙빈최씨 1693-숙원(영수군을 낳았기 때문. 3개월만에 사망), 1694-숙의(연잉군 이금(훗날 영조)을 낳았기 때문) 1695-귀인 1699-숙빈 1718-병사
명빈박씨 1698-숙원 1699-숙의 1702-명빈 1703-사망
영빈김씨 1686-입궐,숙의 1687-소의,귀인 1689-퇴출(기사환국) 1694-(갑술옥사)복위 1702-영빈 1735-사망
귀인김씨 ?
소의유씨 ?
- 숙종의 세명의 비는 모두 자식이 일찍 죽거나, 없었기 때문에 후사를 후궁에 의존했다.
- 숙빈최씨의 기록은 거의 없음. 따라서 본명이 뭔지도 모름. 동이인지 아닌지도 모름. ㅎㅁ
- 숙빈최씨가 원래 무수리라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한건 아님. 어쨌든 기록이 없다는 것 자체가 천한 출신이라는건 확실. 즉 천민이 빈의 자리에까지 오른 조선시대에 흔하지 않는 일이다.
- 고종이 구전으로만 돌던 최숙빈과 연잉군(훗날 영조)사이의 대화를 궁인들에게 알려줬다고 하는데, 어떤게 제일 힘들었냐는 연잉군의 물음에 '세누비가 가장 힘들었습니다.'라고 최숙빈이 답했다고 한다. 궁중에서 세누비를 하는 나인은 침방나인인 경우다. 실제로 영조는 세누비로 만드는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 사실이라면 침방나인에서 인현왕후의 눈에 들어 지밀나인으로, 다시 숙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기까지 드라마틱한 인생이었던 셈.
- 숙빈최씨가 무수리라고 기록한 건 남인들의 기록이라는 설이 있다.
- 인현왕후가 죽은 이후 사실상 숙빈 최씨가 궁중의 실질적인 권력을 다 가졌다고 한다. 새로 들인 인원왕후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로 가고 희반장씨가 왕후가 된 상태에서, 숙종은 희빈의 방자한 행동으로 숙빈에게 더 정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폐비민씨(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이 벌어지는데, 그들과 손을 잡은 숙빈은, 희빈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숙종에게 발고했다. 숙종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남인을 숙청했다. 당시 숙빈은 숙종에게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숙빈에 대한 숙종의 믿음도 있거니와, 당시 남인들이 너무 잘나간것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용한것으로 보인다.
- 인현왕후의 죽음이 희빈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발고한 자도 바로 숙빈이다. 결국 이일로 희빈은 사약을 받게 된다. 결국 희빈을 왕후에서 끌어내린것도 숙빈이요,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한 장본인도 숙빈인 셈이다. 게다가 희빈의 아들은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바로 숙빈의 아들인 영조가 대를 있게되니 결국 숙빈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 명빈박씨도 원래는 상궁이었다가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아마 드라마 동이에서는 안 나올 듯.
- 숙빈최씨가 죽을때까진 희빈장씨의 아들 균이 왕세자였음. 즉 숙빈 최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될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 숙빈최씨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훗날 영조)는 생전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한것으로 유명함. 숙빈최씨가 죽자 연잉군은 영빈김씨를 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 인현왕후 민씨와 명성황후 민씨는 같은 집안임.
- 사씨남정기는 서인인 김만중이 쓴 소설. '사씨부인이 남쪽으로 떠난(쫒겨난) 기록'이라는 의미로 숙종과 인현왕후 이야기다.